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심장부쯤에 자리한 시비우(Sibiu)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고풍스럽고, 살짝 낯설지만 왠지 매력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 사실 이곳은 한 번 발을 들이면 잊지 않고 마음속 어딘가 깊은 곳에 조용히 자리 잡게 되는 도시예요. 크지 않지만 알차고, 오래되었지만 생생하고, 조용하면서도 늘 흥미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그런 곳이죠.
시비우는 루마니아 중부, 카르파티아 산맥 가까이에 있는 도시예요.
자연과 도시의 균형이 정말 잘 잡혀 있어서, 도시를 걷다가 고개를 들면 언제든 눈앞에 산이 펼쳐지고, 구시가를 걷다가도 금세 푸른 언덕을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에요. 게다가 해발 약 400미터 정도 되는 위치에 있어서 사계절 기후가 뚜렷한데요, 여름은 덥지 않고 건조하며, 겨울은 적당히 눈이 내려 도시를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눈 덮인 시비우는 그야말로 동화 속 마을 같아요.
시비우를 만나다.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건물들이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시비우의 구시가지에 가보면 지붕마다 마치 감시하는 듯한 작은 창문들이 있거든요. 이건 ‘루마니아의 눈’이라고도 불리는데요, 원래는 다락방의 공기 순환을 위한 환기창이지만, 이 특유의 형태 때문에 도시 전체가 무언가 말없이 지켜보는 느낌을 줘요. 처음 보면 약간 으스스한데, 몇 번 눈이 마주치다 보면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해요. 이런 작고 위트 있는 디테일이 시비우만의 매력을 더해주는 부분이에요.
도시의 중심은 대광장(Piața Mare)이에요.
이곳은 15세기부터 상업과 사교의 중심지로 사용돼 왔고, 지금도 축제나 시장, 거리 공연이 열리는 아주 활기찬 공간이에요. 광장 주위를 둘러보면 고풍스러운 바로크 건물들과 중세풍 주택들이 어우러져 있어서,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광장의 한쪽에는 브루켄탈 궁전이 있어요. 이곳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이자, 중앙유럽에서도 꽤 의미 있는 컬렉션을 자랑하는 곳이죠. 루벤스, 반 다이크, 티치아노 같은 거장들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붐비지 않아 조용히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점이 정말 좋더라고요.
광장에서 이어지는 작은 골목들을 따라가면 또 다른 광장, 소광장(Piața Mică)이 나와요.
이곳은 좀 더 아늑하고 사적인 분위기를 가진 공간이에요. 카페와 레스토랑, 수공예품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거리 공연이나 주말 마켓이 자주 열려요. 특히나 이 지역은 밤이 되면 조명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진짜 아름다워져요. 큰 소리 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음악과 와인 한 잔, 그리고 마주 앉은 친구와의 대화가 참 잘 어울리는 곳이에요.
소광장에서 살짝 위로 올라가면 거짓말쟁이의 다리(Podul Minciunilor)가 있어요.
시비우의 상징 중 하나인 이 다리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주철 다리로 알려져 있고, 이름처럼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어요. 연인끼리 이 다리 위에서 거짓말을 하면 다리가 무너진다든지, 장사꾼들이 거짓 약속을 하면 벌을 받는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죠. 로맨틱하면서도 살짝 유머 있는 분위기가 이 도시와 참 잘 어울려요.
이곳 사람들은 굉장히 따뜻하고, 어느 정도 차분한 느낌도 있어요. 관광객이 많아도 과하게 상업적인 느낌이 없고, 현지인들도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도시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겨요.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주인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시비우에 스며든 느낌이 들어요.
시비우는 사실 독일계 사슨족이 세운 도시로, 지금도 그 영향이 곳곳에 남아 있어요.
거리명이나 건축 양식은 물론이고, 음식에서도 유럽 중부의 흔적이 묻어나죠. 루마니아식 요리와 독일식 소시지나 파이 같은 것들이 어우러진 독특한 식문화가 있고요, 시비우의 음식은 특히 고기와 유제품, 제철 채소를 잘 활용한 정갈한 맛이 특징이에요. 전통 레스토랑에 들어가 로컬 와인이나 팔린 카 한 잔과 함께 이런 음식을 즐겨보시면, 입으로도 시비우를 여행하는 기분이 드실 거예요.
시비우의 또 다른 매력은 계절마다 도시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점이에요.
봄에는 꽃이 피고 축제가 많아지고, 여름엔 수많은 공연과 페스티벌로 도시 전체가 살아 움직여요. 특히 '시비우 국제 연극제'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문화 행사로, 전 세계 아티스트들이 이 도시를 무대로 무대를 펼쳐요. 길거리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를 따라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죠. 가을에는 단풍과 와인 수확철이 어우러져 따뜻한 분위기가 도시를 감싸고, 겨울이 되면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요. 루마니아 전체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로, 나무 오두막 가게들이 광장을 빼곡히 채우고, 향신료 향이 퍼지는 와인과 따끈한 군밤, 전통 장식품들로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요.
도시 자체가 작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 도보로 충분히 둘러볼 수 있고, 자전거를 타기에도 좋은 구조예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악 지역이나 작은 전원 마을들과도 쉽게 연결되어 있어서, 도시 여행과 자연 여행을 함께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에요. 특히 근교의 Făgăraș 산맥은 하이킹이나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고요, 시비우에서 시작하는 ‘트란스파 가라산 고속도로’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랍니다.
시비우는 자극적이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그 대신 아주 오래된 것들이 조용히 숨 쉬는 공간이에요.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현재의 삶과 멋지게 어우러져 있어서, 걷는 순간순간이 역사책을 넘기는 기분이 들어요.
이 도시는 말하자면, 시간을 들여야 더 많이 보이는 도시예요. 급하게 스치듯 지나가기보다는, 하루 이틀 머물면서 아침 안개 낀 광장의 조용함, 햇살 머금은 골목의 벽돌 색, 느릿하게 걷는 사람들의 표정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진짜 시비우를 만나게 돼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행의 속도가 달라졌음을 느끼실 거예요.
시비우는 눈에 띄는 유명 관광지는 아닐지 몰라도, 이 도시가 건네주는 따뜻함과 조용한 아름다움은 그 어떤 곳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선물이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