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탈린의 푸른 하늘

by ranisamo8 2025. 3. 21.

탈린의 푸른 하늘과 구름 아름다운 건축물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은 북유럽 특유의 차분함과 중세의 정취, 그리고 IT 강국이라는 현대적인 면모까지 한 도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참 묘한 매력을 지닌 도시예요.

 

발트해에 면해 있는 항구 도시인만큼 바람은 늘 조금 차갑고, 그 바람 사이로 살짝 바다내음이 스며들어 있어요. 북쪽에 위치한 도시라 사계절이 확연하고, 특히 겨울에는 해가 짧아 낮 동안의 햇살이 더 귀하게 느껴지죠. 하지만 그런 기후 속에서도 사람들은 의외로 따뜻하고, 도시는 조용하지만 지루하지 않아요. 탈린에 발을 디디면 뭔가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도, 동시에 전자정부의 본고장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 함께 따라옵니다.

 

탈린의 구시가지(Old Town)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인데요, 이 구역을 걷는 것만으로도 중세 유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요. 도시의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돌길을 걷다 보면 높고 단단한 성벽과 붉은 지붕, 높이 솟은 첨탑이 눈앞에 펼쳐지죠. 토툼페아 언덕 위에 오르면 탈린의 전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건 정말 ‘그림 같다’는 표현 말고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예요. 특히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붉은 지붕들과 파란 바다, 멀리 보이는 모던한 빌딩들의 조화가 정말 매력적이에요.

탈린의 푸른 하늘

이 도시가 다른 유럽 도시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면, 탈린은 그 낡은 아름다움 뒤에 놀라울 만큼 디지털화된 사회가 숨어 있다는 점이에요. 에스토니아는 세계 최초로 인터넷 투표를 도입한 나라이고, 의료기록이나 주민등록, 세금 신고 등 거의 모든 행정이 온라인으로 이루어져요. 도시를 걷다가도 종종 무료 와이파이 존을 만나게 되고, 식당이나 카페, 심지어 노점에서도 카드 결제는 기본이에요. 구시가지의 돌바닥을 밟으며 중세풍 건물 사이를 걷고 있는데,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한 현실. 그 독특한 대비가 탈린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줘요.

 

탈린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조용하고 정돈되어 있어요. 특히 구시가지에서는 자동차 소리보다 발걸음 소리와 바람 소리가 더 많이 들리고, 작은 골목 안에 숨겨진 카페나 공방을 찾아다니는 재미도 쏠쏠하죠. 시청사 앞 광장은 탈린 여행의 출발점처럼 여겨지는데, 이곳에 서 있으면 주변의 고딕 양식 건물들과 색색의 파스텔톤 벽면, 그리고 멀리 보이는 성 올라프 교회의 뾰족한 첨탑이 마치 옛 그림 속 장면처럼 느껴져요.

 

성 올라프 교회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기도 했어요.

지금은 물론 더 높은 건물들이 많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기술력이었죠. 지금도 탑 꼭대기에 올라가면 탈린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그리고 발트해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펼쳐져서 올라갈 만한 가치가 충분해요. 계단이 꽤 좁고 가파르긴 하지만, 오르고 나면 꼭대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꽤 시원하게 느껴져요.

 

도시 안에서 특별히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좋을 만한 체험 중 하나는, 단순히 카페에 앉아 있는 거예요.

탈린 사람들은 커피를 참 좋아해서 구시가지 안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요. 에스토니아는 전통적으로 단맛을 많이 즐기지는 않지만, 계피나 생강이 들어간 빵이나 구운 견과류를 곁들인 간단한 디저트들이 꽤 훌륭해요.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 친구와 담소 나누는 사람, 혼자 조용히 노트북 작업하는 사람들 틈에서 따뜻한 머그를 손에 쥐고 있으면 그 자체로 여행의 여유가 느껴지죠.

 

탈린의 사람들은 내성적인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친절하고 조용한 배려가 몸에 밴 사람들이에요.

크게 웃거나 흥분된 반응을 하지는 않지만, 필요한 도움은 정확하게 건네주고, 무엇보다 여행자에게 무심하지 않아요. 물론 에스토니아어는 꽤 낯설고 언어 구조도 특이하지만, 다행히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영어에 능숙해서 소통에 어려움은 거의 없어요.

 

계절에 따라 탈린은 완전히 다른 도시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여름에는 해가 길어서 밤 11시까지도 환한 날이 많고, 도시는 활기로 가득 차요. 도심 곳곳에서는 음악 축제나 예술 전시가 열리고, 거리 공연도 많이 볼 수 있어요. 탈린 음악 주간이나 바다의 날 같은 지역 행사도 이 시기에 맞춰 열리기 때문에 여행자 입장에서는 더없이 흥미로운 시기죠. 반대로 겨울엔 해가 짧고 눈이 자주 오지만, 그 덕분에 도시가 조용한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변해요. 특히 구시가지 광장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북유럽에서도 꽤 유명한 편이에요. 장작 냄새, 따뜻한 와인, 수제 목공예품, 눈 속의 거리 조명… 어느 하나 그냥 지나치기 힘든 장면들이 도시 곳곳에 가득해요.

 

탈린 근교에도 흥미로운 곳이 많아서 하루쯤 시간을 내어 다녀오면 좋아요. 대표적으로 카두리오르그(Kadriorg)는 탈린 시내에서 트램을 타고 조금만 가면 닿는 공원 지역인데요, 여기에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지은 여름궁전이 있어요. 바깥 정원도 아름답고, 내부 미술관도 알차서 여유 있게 둘러보기에 좋아요.

 

그리고 탈린을 떠올릴 때 IT 강국이라는 인식도 빼놓을 수 없어요.

스타트업 열기가 강해서 유럽에서 창업 도시로 주목받기도 하고, 스카이프 같은 글로벌 서비스도 이곳에서 시작됐어요. 그래서인지 도시 곳곳에 공유 오피스, 스타트업 라운지 같은 공간이 많고, 심지어 호텔이나 호스텔에서도 코워킹 스페이스가 자연스럽게 마련되어 있어요.

 

도시 전체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아서, 이틀이면 주요 명소는 다 돌아볼 수 있어요.

하지만 탈린이 주는 감정의 깊이는 그보다 훨씬 오래 머물러야 알 수 있어요. 관광지로서의 탈린은 ‘예쁘다’, ‘깔끔하다’는 인상이지만, 시간을 들여 골목을 걷고, 언덕 위에서 바람을 맞고, 카페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순간들 속에서 탈린은 조용히 말을 걸어와요.

 

이 도시는 급하지 않아요. 뭔가를 크게 자랑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자기만의 색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탈린에 머무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더 조용히 생각하고, 그날그날의 순간에 집중하게 돼요.

여행의 참맛이란 어쩌면 이런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탈린은 그런 의미에서, 짧지만 오래 남는 여행의 온도를 가진 도시입니다.